창덕궁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

창덕궁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

김가연 /

2023-07-09

HERITAGE

조회수 185

  • 안녕하세요?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을 알려드리고 싶은 USCO 11기 청소년 해설사 김가연입니다. 여러분께 자연과 궁궐의 조화가 시작되는 창덕궁의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출처 : 직접 촬영

  •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입니다. 태종 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때 재건하였습니다. 그 뒤 승정원 화재 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하였습니다. 또한 순조는 선정전 서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다시 재건하였습니다. 인정문에서는 역대의 많은 왕들의 즉위가 있었는데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이 이 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습니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인정전의 문비는 일제 때에 왜식이 가미되어 변형된 부분이 많습니다. 인정문은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사진 출처 : 직접 촬영

  •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습니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았습니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습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입니다.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습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은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은 보수공사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라는 병풍이 있습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합니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진 출처 : 직접 촬영

  • 선정은 정치를 널리 펼친다는 뜻으로 이름처럼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하던 공간입니다. 이런 곳을 편전이라고 하는데 왕은 이곳에서 매일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그날의 해야할 일들을 보고받았습니다. 때로는 신하들과 함께 유교경전을 읽고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전인 인정전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편전인 선정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선정전 지붕에는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올렸는데 청기와는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청색을 내기 위해서는 회회청이라는 비싼 수입 알료를 사용해야 했고, 허약과 탄약을 제작하는데 사용되는 비싼 염초도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만드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17세기 이후에는 청기와 사용을 줄였고 현재 조선시대 궁궐에 남아 있는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이 유일합니다. 왕이 머무는 곳이므로 중앙 안쪽에 어좌가 있고 그 뒤에 왕을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어좌 위 천장에는 황금색 봉황과 꽃구름이 화려하게 조합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의 하루는 무척 바빴습니다. 대체로 새벽 4시에 일어나 왕실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며 하루를 열었는데 이후 오전시간 내내 경연과 아침 조회에 참석하고 신하들로부터 각종 보고를 받았습니다. 낮시간에는 중요한 방문객들을 만나는 한편, 그날밤 대궐에 호위를 맡을 군사와 장수, 숙직 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 암호를 미리 정하는 일도 왕의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저녁시간에는 법령을 검토하고 밀린 업무를 보거나 개인적인 공부를 했습니다. 비공식 행사나 국가 재례에 참석하고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문이나 탄원서를 챙겨야 했습니다. 게다가 왕이 하는 말과 행동은 사관이라는 관원들이 모두 기록했고 이 기록들을 기초로 조선왕조실록이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낙마사건이 있습니다.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태종은 말에서 떨어진 것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길 원했지만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관이 이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이곳이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빈전이란 무덤이 만들어질 때까지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모시는 곳이고 혼전이란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입니다. 왕이 세상을 따나면 약 5개월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셨고 3년상이 끝날 때까지 신주를 혼전에 모시다가 종묘로 옮겼습니다. 선정전이 돌아가신 왕의 공간으로 쓰일 때 살아계신 왕은 선정전 동쪽에 있는 희정당을 사용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출처 :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