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연 /
2023-09-09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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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을 알려드리고 싶은 USCO 11기 청소년 해설사 김가연입니다.
여러분께 왕실의 일상을 알 수 있는 창덕궁 내전 중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희정당은 한자로 정서 정자에 빛날 희입니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를 빛낸다는 뜻으로 정치를 잘 해서 백성들이 즐거워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인 침전으로 만들어졌지만 조선후기 선전정이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왕이 평상시에 나랏일을 하는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전각이 만들어진 해와 초기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19세기에 그린 궁궐도를 보면 창덕궁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 희정당은 여러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집이었고 연못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일어난 대화재 때 소실된 것을 1920년 경복궁에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와 재건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서양의 건축양식이 도입되어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희정당의 입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건물 중앙에 돌출되어 있는 입구의 모습은 얼핏봐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정당의 입구는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특히 자동차의 움직임을 고려해서 만든 마치 호텔 로비 입구처럼 생긴 곡선모양의 돌길이 특징입니다.
당시 창덕궁에서 지내던 순종과 순정 효황후는 자동차를 이용했는데 두 대의 자동차 모두 문화재로 등록되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차체가 목재로 만든 검붉은색의 자동차로 차 문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금도금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차의 내부 역시 오얏꽃이 수놓인 황금 비단으로 꾸며서 화려함과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희정당에도 전기가 쓰인 흔적이 있습니다. 희정당 내부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내부 곳곳에 서양측의 장식과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커튼박스과 상들리에, 뚜껑이 있는 책상인 롤탑데스크 등을 볼 수 있습니다.
희정당의 내부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 김규진의 그림이 양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동쪽벽에 있는 그림은 금강산총석정절경도이고, 서쪽벽에 있는 그림은 금강산만물주승경도인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창덕궁에 일어난 대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보수될 때 일본은 일본화가 그림을 창덕궁 전각 내벽에 그려 넣도록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순종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드리지 않았고 조선의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대조전이 속해 있는 내전은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입니다.
특히 대조전은 왕비가 생활하시는 곳, 왕비의 침전이었습니다.
대조란 대업을 이룬다는 뜻으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탄생을 의미했습니다.
대조전과 희정당은 연결되어있습니다. 재건된 희정당과 대조전 사이의 마당에는 양옆으로 복도각이 나있어 희정당에서 일을 마친 왕이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다른 점은 용마루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왕비의 침전은 다음 대를 이을 용, 왕이 탄생하는 공간인데 다른 용이 위에서 기운을 누르면 안된다고 해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비들은 위로는 대비마마와 왕대비마마를 받들고 궁안의 모든 여인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러 직급의 궁녀들에게 상과 벌을 내리고, 직급을 내리거나 올리는 일도, 왕의 총애를 얻어 후궁이 된 사람들에게 직급을 주는 일도 왕비의 몫이었습니다.
대조전은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소실된 것을 경복궁 교태전의 목재를 이용해 1920년에 재건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내 장식, 내부 설비 등이 서양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넓은 대청은 사이에 두고 양의 방향에는 왕의 침실이, 음의 방향에는 왕비의 침실이 있는데 왕비의 침실에 놓여있는 용문양의 화려한 침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 효황후가 사용했던 침대입니다.
대청에는 커튼박스와 샹들리에가 있어 당시 왕실에서 근대적인 문물을 사용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대조전에 딸린 수라간은 1921년에 근대식으로 개조되어 수도시설과 오븐이 설치되었고 전기도 들어왔습니다.
대조전 뒷편에는 계단식 정원인 화계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빗물에 산자락이 무너지거나 쓸려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내명부일로 지친 왕비와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궁녀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성정각은 조선의 세자가 머물먼서 장차 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배우고 익히는 곳입니다.
성정각 일원은 세자의 공간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궁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동궁에서 지낸다고 해서 세자를 동궁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왕세자는 어질고 착한 왕이 되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정각에서 하루에 3번씩 유교경전을 공부하는데 아침수업을 조강, 낮수업을 주강, 저녁수업을 석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시간을 내서 보충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해강이라고 해서 매달 두어번씩은 여러 스승 앞에서 배운 내용을 평가받습니다.
가끔 해강에 왕도 참여하여 세자의 실력을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매일 수업을 시작할 때는 전날에 배운 것을 완벽하게 외워야 진도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왕세자는 악기, 붓글씨, 무예를 배우고 왕을 대신에 나랏일을 돌보는 대리청정과 군사훈련도 했습니다.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후계자 수업을 들었습니다. 성정각은 한때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내의원은 인정전 서편에 있는 궐내각사 안에 있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시절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원래 내의원을 회수했기에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했습니다.
내의원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성정각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행각에 있습니다. 현판이 두개가 있는데 왼쪽에는 조화어약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왕이 드시는 약을 조재한다는 뜻이고 오른쪽에는 보호성궁이라고 쓰여있는데 약을 지어 왕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성정각 동문인 자시문 앞에 있는 홍매화나무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사진을 찍으면 좋은 곳입니다.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 해설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